선거철마다 등장하는 ‘이민 카드’…뉴질랜드 정치의 오래된 공식

뉴질랜드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이민 문제가 다시 정치권의 주요 논쟁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뉴질랜드 퍼스트(NZ First) 대표 윈스턴 피터스 외교장관이 의회에서 중국계 녹색당 의원 로런스 쉬난(Lawrence Xu-Nan)에게 “당신이 온 곳으로 돌아가라”고 발언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크리스토퍼 럭슨 총리는 해당 발언을 인종차별적이라고 비판했지만, 피터스는 의원의 야유에 대응한 것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럭슨 총리는 피터스의 외교장관직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면서도 “현재 본격적인 선거운동 국면에 들어섰다”며 해당 발언이 선거를 앞둔 정치적 계산과 관련 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피터스뿐만이 아니다.
지난 4월 NZ First 부대표 셰인 존스 의원은 뉴질랜드와 인도의 자유무역협정을 비판하면서 이를 “버터 치킨 쓰나미”에 비유했다. 인도계 커뮤니티에서는 이를 불쾌한 발언이라고 비판했고, 일부에서는 11월 총선을 앞둔 정치적 발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선거 때마다 반복된 ‘이민 정치’
빅토리아대학교 역사학자 세카르 반디요파디아이는 RNZ와의 인터뷰에서 “이민은 모든 선거에서 항상 중요한 이슈였다”며 올해도 예외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뉴질랜드에서 이민이 선거 정치와 본격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당시 뉴질랜드는 국제 유가 충격과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물가 상승과 실업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이민자들이 사회·경제적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기 시작했다.
1975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국민당의 로버트 멀둔은 강경한 이민 정책을 내세웠고, 태평양계 이민자들을 경제와 복지에 부담을 주는 존재처럼 묘사한 논란의 TV 광고까지 내보냈다.
멀둔은 선거에서 압승했고 이후 1984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아시아계 이민 증가와 NZ First의 등장
1987년 노동당 정부의 데이비드 랭 총리는 이민법을 개정했다.
새로운 제도는 출신 국가나 인종보다는 교육, 사업, 전문성, 연령, 자산 등 개인의 능력을 중심으로 이민자를 선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후 아시아 국가 출신 이민자가 크게 증가했다.
1986년부터 1996년 사이 뉴질랜드의 아시아계 인구는 최소 세 배 증가했으며 대만, 홍콩,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등에서 이민자가 유입됐다.
이런 급격한 인구 변화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커지던 시기에 윈스턴 피터스는 1993년 NZ First를 창당했다.
1996년 첫 MMP 선거를 앞두고 피터스는 높은 이민 수준과 이른바 ‘비전통적 이민자’를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아시아계 이민 증가를 ‘Inv-Asian’이라는 표현으로 다루기도 했고,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영어 능력과 학교·주택·사회서비스 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확산됐다.
피터스는 1996년 선거에서 이민 문제를 핵심적으로 내세웠고 NZ First는 정당 득표율 13.4%를 기록했다.
피터스는 처음으로 정권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킹메이커’ 위치에 올랐다.
2005년에도 다시 등장한 ‘아시아 이민’ 문제
NZ First의 지지율은 선거마다 크게 변동했지만 이민 문제는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2005년 총선을 앞두고 피터스는 다시 아시아계 이민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는 당시 뉴질랜드를 “마지막 아시아 식민지”라고 표현하며 정부의 느슨한 이민정책이 뉴질랜드의 모습을 영구적으로 바꾸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터스는 자신의 주장이 인종차별이 아니라 작은 남태평양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이민 규모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강조했다.
2014년에는 중국인 부동산 구매 문제를 선거 캠페인에 활용해 또다시 논란이 일었다.
높은 이민자 유입, 다시 정치 쟁점으로
존 키 전 총리가 집권한 2008년 당시 뉴질랜드의 연간 순이민은 약 4,700명 수준이었다.
이후 이민이 크게 늘면서 2017년에는 연간 순이민자가 7만2,500명을 넘어섰다.
높은 이민으로 주택과 교통 등 인프라 부담이 커졌다는 지적이 나오자 2017년 총선을 앞두고 노동당과 NZ First 모두 이민 규모를 줄이겠다고 공약했다.
당시 노동당은 연간 순이민을 2만~3만 명 수준으로 낮추겠다고 했고, NZ First는 1만 명 이하를 목표로 제시했다.
다만 이때부터 정치권의 논쟁은 ‘이민 자체를 반대할 것인가’보다는 뉴질랜드가 감당할 수 있는 적정 이민 규모가 얼마인가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이후 다시 바뀐 이민정책
2020년 총선 당시에는 코로나19로 인한 국경 봉쇄와 록다운이 이어지면서 이민은 정치권의 최우선 현안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2022년부터 국경이 다시 열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노동당 정부는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인증 고용주 취업비자(Accredited Employer Work Visa) 제도를 도입했고, 1년 동안 8만 건이 넘는 비자가 발급됐다.
이후 이주 노동자 착취 사례가 크게 늘었다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이민정책에 대한 논란도 다시 커졌다.
2023년 총선을 앞두고 국민당, ACT, 노동당 등 주요 정당들은 이민자 가족과 부모·조부모 관련 정책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런데 지금 뉴질랜드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는?
흥미로운 점은 현재 이민이 국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적 이슈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7월 실시된 Ipsos ‘Issues Monitor’ 조사에서 이민은 국민들이 꼽은 주요 현안 가운데 11위에 머물렀다.
생활비, 의료, 경제, 주택, 실업 등이 상위권을 차지했으며 이민을 중요한 문제라고 답한 응답자는 8%에 그쳤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다시 이민과 아시아계 커뮤니티를 정치적 논쟁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인도와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과정에서 이민 문제가 다시 논쟁이 되고 있다. 피터스는 해당 협정이 이민 측면에서 뉴질랜드에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해 왔다.
반면 뉴질랜드 국민들의 아시아에 대한 인식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지난 6월 발표된 ‘아시아와 아시아인에 대한 인식 조사’에서는 뉴질랜드 국민의 81%가 아시아와의 관계 발전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음식과 여행, 엔터테인먼트 등을 통해 아시아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빅토리아대학교의 폴 스푼리 교수는 이민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민이 뉴질랜드에 얼마나 중요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더 많이 알리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출처: RNZ
뉴질랜드의 이민정책은 앞으로도 선거 때마다 중요한 논쟁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민 문제를 논의하는 것과 특정 인종이나 출신 국가의 사람들을 선거의 표적처럼 다루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입니다.
특히 아시아계 이민자가 크게 늘어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 출신 이민자들은 뉴질랜드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이민과 아시아계 커뮤니티가 다시 정치적 수사의 대상으로 등장할 수 있는 만큼, 유권자들도 정치인들의 발언이 실제 정책에 대한 논쟁인지, 아니면 표심을 얻기 위한 공포와 갈등의 정치인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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